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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로그라인

밤에 내리는 봄비가 좋은 계절

by 로그라인 2023. 5. 5.

저녁부터 밤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그냥 우산을 받쳐 들고 산책을 나가고 싶어 진다.
늦은 밤 시각에 내리는 비가 특히 좋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우산을 쓰고 밤길을 나서면
우산에 딱딱딱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듣기 좋다.
한산한 밤거리를 어둑한 가로등 불빛들이 
추적추적 내 발자국을 따라오면  
아주 먼 옛날의 비 오는 풍경들도
어느새 나와 함께 보조를 맞추며 걷는다.

나는 언제부터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 키우던 강아지가 비가 오면
그렇게 꼬리를 흔들던 때부터 나도 좋아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첫 직장을 잡고 언젠가 비 오던 밤이었다.
그때도 오늘 같은 봄날이었던 것 같다.
모두 사회초년생이었던 우리들은 회식을 하고
굵어지는 빗소리에 너도나도 앞 다투어 거리로 나왔다.
지금은 그녀의 이름조차 잊었지만,
마치 한 마리 강아지처럼
스타킹을 벗어 던지고 하이힐도 벗어 두 손에 쥐고
맨발로 폴짝폴짝 뛰며 빗물을 탁탁 튀기던
그녀의 가벼운 몸놀림은 
오늘같이 비가 올 때면 문득 되살아난다.

그날, 그 밤의 봄비는
우리들의 청춘을 닮았었던 것 같다.
잘 알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 똬리를 틀었던 울분을 씻어주며
알 수 없는 내일의 불안을 잠시 제쳐두고
막무가내로 현재에만 뛰어들기를 재촉하는
빗소리였던 것 같다. 

밤에 비가 오면 
공원에 산책을 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고즈넉한 길 모퉁이를 돌아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탁'하며 캔맥주 따서 한 모금 모시면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며
지나온 날들의 추억들도 맥주 거품처럼 되살아난다.

직장에 다닐 때는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똘똘똘'하는 소리 때문에 소주를 좋아했었던 것 같다.
그 소리는 흩어졌던 연대를 한 곳으로 모으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탁'하고 캔 딸 때 나는 소리에 만족하며
이렇게 아무도 없는 밤거리에서
산들바람과 함께 묻어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들이키는 맥주가 좋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비 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동지와 밤을 하얗게 새우며 마셨던
그날도 생각난다.
아마 그때는 여름 초입이었던 것 같다.
여름 소나기는 봄비와 다르게 격정을 일깨우는 데가 있고,
생의 결연함을 촉구하는 비장함이 있어
그것대로 좋다.

조금 있으면 여름이 올 테고,
여름이 오면 그때 그날의 밤처럼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을
나도 모르게 그리워하며
밤을 보내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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