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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상/시와 에세이

김용택 시가 내게로 왔다, 파블로 네루다

by 로그라인 2022. 9. 3.

시(詩)가 내게로 오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제각기 인생에 훅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영겁의 세월이 쌓이고 쌓여서 시작도 끝도 모르는 그 아득한 시절의 어느 한순간, 한 점으로 응축되어 있던 우주의 알갱이가 대폭발을 했던 것처럼 온 존재를 갑자기 뒤흔드는 순간에 시는 유령처럼 찾아온다.

시가 운 좋게도 이른 시기에 어린 영혼에 찾아들면 그 소년은 위대한 시인이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칠레의 민중 시인 파블로 네루다이다. 그는 자신에게 시가 찾아온 순간을 '시(詩)'에 담았다. 아래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詩) 전문이다.

시(詩)/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나를 찾아왔다. 모른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인지 나는 모른다.
아니다. 그건 누가 말해 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며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혼자 돌아오는 고독한 귀로에서
그곳에서 얼굴 없이 있는
나의 가슴을 움직였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다.
熱(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한 내 나름대로 해보았다.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지.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다.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구부러진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微小(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지.

김용택, 시가 내게로 왔다(마음산책, 2001)

파블로 네루다(1904 -  1973) 프로필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사회주의 정치가.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Neftalí Ricardo Reyes Basoalto). 체코의 시인 얀 네루다에서 따온 필명 파블로 네루다가 본명이 되었다. 아버지의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필명을 사용했다.

7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파블로 네루다는 1921년 <축제의 노래>로 문단에 데뷔했다. 1924년, 시집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1933년 <지상의 거주자>, 1950년 <위대한 노래>를 발간했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반 파시즘 선봉에 선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공산당 상원의원이 되었으나 공산당이 비합법 단체로 규정되고 체포령이 떨어지자 망명길에 올라 불의의 권력에 저항하며 시를 쓰다 1973년 영면했다. 파블로 네루다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투쟁하며 죽었던 이들을 당신들에게 인도하는 날,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삭을 땅에 주어진 하나의 밀알에서 태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은 밀처럼 뿌리를 모으고, 이삭을 모아, 고통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밝은 곳을 향해 올라갈 것입니다."
- 파블로 네루다, '해방자들' 중에서

김용택의 시가 내게로 왔다

파블로 네루다의 삶은 매혹적이었다. 이십여 년 전 김용택의 <시가 내게로 왔다>를, 어째서인지 파블로 네루다의 번역 시선집이나 그런 것인 줄 알고 샀던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외국 시 서너 편이 있긴 했으나, 한국 시인들의 시를 묶은 시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제목 빨 만 보고 책을 사는 오류를 저지르며 산다.

김용택의 <시가 내게로 왔다>는 김용택이 좋아하는 시를 묶은 시집이었다. 오, 맙소사, 시선집도 아니고, 어느 이름 모를 시인이 좋아하는 시들의 모음이라니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했다. 

거기다 김용택이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한 시들을 보니 영 아니었다. 나는 시인 정지용의 시들을 비교적 좋아했다. 시가 내게로 왔다에는 정지용의 '향수'가 아닌 '호수 1'이 실려 있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밖에. 아주 짧은 연애 시다. 젊었을 때는 이런 유형의 시들을 혐오했다. 우리의 시인 정지용도 외로운 밤이 있었을 것이고, 그 밤에 그냥 낙서처럼 '호수 1'을 섰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를 그의 대표 시로 소개하다니, 쯧 실망스러웠다.

목차에 최영미가 눈에 띄어 보니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아닌 '선운사에서'라는 평범한 시를 소개하고 있었다. 최영미 시인 또한 정지용 시인처럼 외로운 나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최영미도 '에이 시발'하면서 시 한 편 썼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시를 소개하다니, 쯧 실망 제곱이었다. 

최영미 시인의 시 '선운사에서' 전문을 보면, 애인과 헤어진 화자가 선운사라는 절에 가서 꽃이 지는 걸 보았는데, 그 꽃은 저토록 쉽게 지는데, 나는 왜 이리도 이별한 애인을 잊는 것이 힘들까라는 감상을 노래한 것이다. '선운사에서'는 시라기보다 그저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꽃도 쉽게 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쉽게 지는 게 결코 아니기에.

그런데도 시인은 자기 경험의 고통만을 최고로 끌어올려 '선운사에서'라는 시를 썼다. 그러니, 이건 시적 경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김용택이라는 시인은 이 시를 소개하고 있다.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가 내게로 왔다에는 조운이라는 시조 시인의 '산에 가면'이라는 짤막한 시도 소개되어 있었다. 이 역시 연애시다. 남들은 다 애인이 있는데, 지만 없다는 자조 섞인 한탄의 시다.

고구려의 유리명왕이 기원전 17년경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황조가'를 이천 년을 뛰어넘어 패러디한 것이 겨우 이 정도 밖에 안되나 싶었다. 차라리 황조가를 싣든가. 쯧, 실망 세제곱이 되었다. 

황조가(黃鳥歌)/ 고구려 유리명왕

"翩翩黃鳥(편편황조) 雌雄相依(자웅상의) 念我之獨(염아지독) 誰其與歸(수기여귀)”
“펄펄 나는 저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노니는데 외로울 사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시가 내게로 왔다>를 쭉 살펴보니 연애 시를 주종으로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 방구석 어딘가에 던져두고 잊었다. 그런데 이사를 그렇게 여러 번 했는데, 이 시집은 오늘까지도 끈덕지게 내 곁에 붙어 있었다. 그래서 가끔 들춰본다. 들춰보면 통 못 볼 건 또 아니어서, 자꾸 보니까 수록된 시들이 정이 들기도 한다. 

김용택 프로필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순창 농림고등학교를 나와 스무한 살 때부터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82년 '섬진강'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섬진강>, <그대 , 거침없는 사랑>, <나무>, <연애 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등이 있고,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등이 있다.

시가 내게로 왔다

시는 언제든 인생에 끼어들 수 있고, 튕겨져 나갔던 시들이 다시 슬그머니 들어오는 때도 있다. 김용택의 <시가 내게로 왔다>도 그헐게 다시 들어오는 시들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격렬한 불꽃보다 그저 낙담에 그득한 자조 섞인 탄식들이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는 빈틈이 더 많이 생기는가 보다. 

젊은 날에는 시인이라면 응당 파블로 네루다 같이 결연하고 고결한 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야에 묻혀서 목가적인 풍경이나 노래하고 연애 타령이나 하고 앉아 있는 놈들이 무슨 시인인가 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영원히 팽창할 것 같았던 영혼도 수축하기 마련이다. 수축의 세월이 시작되면 우주가 알갱이었던 시절도 되돌아간다. 연을 쌓아온 모든 것들과 이별이 시작되는 순간, 김용택의 <시가 내게로 왔다>가 아주 작은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호수만 하니 눈감을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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