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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상/인문교양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릿 너머 민들레 법칙

by 로그라인 2022. 9. 6.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릿과 민들레의 법칙

룰러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정지인 옮김, 곰 출판, 2021)는 특이하고 경이로운 논픽션이다. 소설보다 문학적이고, 추리소설보다 사건의 단서를 추적해가는 스릴이 더 넘친다. 어떤 교양 과학서적보다 철학적인 물음을 깊게 던지는 책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류 분류학자이자 스탠퍼드대 초대 학장을 지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과 저자의 삶이 씨줄과 낱줄처럼 교차하며 한 편의 이야기를 직조해 간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와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 그리고 삶의 엄청난 반전이 정교하게 이야기를 추동한다.

채 3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작은 책에 이토록 큰 세계를 담았다니, 간결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저자의 과학적 글쓰기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책표지
혼돈의 시대, 코로나와 함께 이 책은 발표되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줄거리

저자 룰루 밀러

과학전문기자로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Peabody Awards)을 수상했다. 15년 넘게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국(NPR)에서 일하며 《뉴요커》, 《VQR》, 《오리온》, 《일렉트릭 리터 리처(Electric Literature)》, 《캐터펄트(Catapult)》 등에 꾸준히 글을 기고해왔다.

화학자인 아버지는 어린 룰루 밀러에게 인간은 개미와 다를 바 없다는 과학 정신을 심어주었다. 룰루는 여섯 살 어린 그레이스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룰러 밀러는 이성애자로 알고 살아왔으나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였다. 동거하던 곱슬머리 남자가 그녀의 성 정체성을 알고 떠나가자 극심한 충격과 혼돈에 빠진다.

그러나 룰러 밀러는 곱슬머리 남자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자신의 혼돈과 무의미한 세월을 견디어 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줄 정신적 지주로서 생물 분류학자 데이비스 스타 조던의 삶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 1931)

생물 분류학자이자 스탠퍼드대 초대 학장 역임. 코넬 대학에서 과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어린 시절 집에서 몰래 빠져나가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을 익히려 했고, 5년 만에 밤하늘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미들 네임 '스타 starr'도 그가 골랐다. 

데이비드와 그의 연구팀은 어류 1만 2,000~1만 3,000종 가운데 2,500종 이상을 발견하고 학명을 붙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수집한 어류 표본이 풍비박산 나는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물고기의 살에 표식을 꿰매는 작업에 돌입하는 놀라운 신념과 끈기를 보였다.

룰러 밀러는 곱슬머리 남자에게 앞으로는 여자와 키스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잘못을 비는 이메일을 보내고 그를 기다리는 고통의 3년 동안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에 집요하게 빠져들었다. 

데이비드는 대지진으로 물로기 표본들이 박살나자 물고기의 몸에 바늘을 찔러 이름표를 다는 작업을 곧바로 착수했다.

어린 시절, 하늘의 별이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들판에 핀 꽃에 빠져 있었던, 또래로부터 놀림을 받던 볼품없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어떻게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의 참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를 룰러 밀러는 너무나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면 자신도 어떤 희망을 품고 이 세상을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전반부는 부모의 눈 밖에 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스탠퍼드대 초대학장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세상의 모든 물고기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겠다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불굴의 의지와 투지는 명성을 불러왔고, 스탠퍼드대학을 세운 릴런드와 제인 스탠퍼드 부부로 하여금 그를 초대 학장에 초빙하게 했다.

스탠퍼드대 초대 학장이 된 데이비드는 첫 번째 아내가 병으로 죽는 시련 앞에서도, 딸 바버라를 잃는 고통 앞에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새로운 물고기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는 과업을 멈추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사모아로 갔고, 러시아로, 쿠바로, 하와이로, 알바니아, 일본, 한국, 멕시코, 스위스 그리고 그 너머까지 어류 수집 원정을 떠났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그의 과업을 단 한순간에 파괴해버려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실패와 역경을 딛고  '그릿'

무엇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대재앙 앞에서 절망하기보다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며 다시 희망에 찬 신념으로 재건의 발걸음을 다시 걷게 했을까. 저자 룰루 밀러는 평범했던 데이비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용기의 단서를 그의 오래된 에세이에서 마침내 발견했다. 

데이비드의 에세이에서 저자가 발췌한 내용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의 그러한 성격적 특성을 심리학자 더크워스가 정의 내린 '그릿'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그릿의 대표주자였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바라는 목표를 향해 끈질기게 일하고 그런 다음 결과를 차분히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아가 나는 일단 일어난 불운에 해해서는 절대 마음 졸이지 않았다."
- 데이비드 스타 조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마음가짐은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동아시아인 그렇게 닿고자 했던 경지와 그대로 일치한다. 자신의 할 일은 최선을 다해 다하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인간으로서의 최고 경지 말이다.

심리학자 더크워스는 웨스트포인트 사관생, 최고경영자, 뮤지선, 운동선수, 셰프 등 거의 모든 직업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에게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고 그 특징에 귀에 착 달라붙는 '그릿 Grit(끈질긴 투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을 그릿으로 불렀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능력,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그릿이다."(143쪽)

그릿이 그런 거라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야말로 그릿의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삶을 산 인물이었다. 간혹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심각하게 오독한 독자가 그래, 나도 지금부터 '그릿!', 희망에 부풀어 엉뚱한 구렁텅이로 자신을 몰아넣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얼마든지 그릿 해도 좋으나 자식들에게는 '그릿'을 강요하지는 말어라.

그릿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궁극적으로 실패를 하게 되면 결국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 부족탓을 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한국 축구 국대들이 수없이 들었던 말, 정신이 해이하다느니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그 말을 당신의 자식들에게는 제발 하지 마시라. 그릿이 있다고 누구나 아인슈타인이나 빌 게이츠나 김연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릿을 가지고도 실패하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다. 성공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구해보니 이들에게 '그릿'이라는 특질이 있더라고 규정하는 것은 생존자 편향이나 일종의 통계 착시에 다름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릿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속되는 행운도 있었고, 넘사벽 재능도 몰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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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 부분을 치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그래도 룰루 밀러는 '그릿'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의 반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추악한 진실은 우리들을 역겹게 만든다. 혹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어보실 의향이 있으신 분들은 나머지 부분은 완독 후 읽어주시기 바란다. 여기서부터 추리소설의 재미가 번뜩이는 스포일러에 해당하니까.

제인 스탠퍼드 부인의 죽음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그가 쓴 논문은 물론이고, 회고록과 동화, 에세이, 강의계획서, 교과서, 신문에 발표한 각종 논설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계된 모든 저작물들을 기록 보관소에서 끈질기게 읽고 또 읽었다. 룰루 밀러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연구한 방식, 역시 '그릿'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 부인 제인은 스탠퍼드대의 전권을 쥐었다. 데이비드의 제자이자 스탠퍼드 교수의 '불륜 행각'을 사서가 고발하자, 데이비드는 역으로 사서를 '성도착자'라는 누명을 씌워 학교에서 내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인이 데이비드를 해고할 것이라는 소문이 교내에서 공공연히 돌았다. 

1905년 1월 14일, 제인은 자택에서 독극물 스트리크닌이 든 생수를 마셨지만 겨우 목숨은 구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에 제인은 휴양차 하와이로 떠난다. 하와이의 최고급 호텔 모아나에 투숙한 지 일주일 만에 제인은 다시 스트리크닌이 든 음식물을 먹고 사망했다. 언론은 처음에는 독살로 보도하였으나, 후에는 과로와 과식으로 사망한 것으로 뒤바뀌었다.

룰루 밀러는 이 모든 배후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정황 증거들을 채집하고 기록하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실었다. 스탠퍼드대 측의 소송을 예상하지 않았더라도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살인자로, 혹은 살인교사범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학적 글쓰기를 하는 저자로서는 명확한 증거 없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조차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출간되고 여섯 달 뒤, 스탠퍼드 대학과 인디애나대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이 붙은 건물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두 학교 모두 학생들과 임직원, 교직원, 졸업생들이 편지와 기사, 온오프라인 시위로 항의한 결과 내려진 결정이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어류 학계 거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릿 때문이었다고 치자. 하지만 그릿은 스타 조던을 괴물로 만들기도 했다. 끈질긴 투지의 이면에는 '나는 할 수 있다, 어떤 역경에도 내가 마음먹은 것은 해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스탠퍼드대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자신의 제자들로 스탠퍼드대 교수직을 채웠으며, 제자를 고발하는 사서를 협박해 내쫓았다. 스타 조던은 자신이 목표로 향해 곧장 직진하는 괴물이었다. 자신을 해고하겠다는 스탠퍼드 부인도 자신의 생각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만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독수를 뻗쳤을 그를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열광적인 우생학 지지자로 빈곤과 타락은 유전되기에 박멸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우생학을 지지하는 논문을 발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생학을 미국에 들여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우생학적 불임화 법이 통과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불임화 시술을 강제적으로 받는 비극을 겪었다.

그릿 너머 '민들레 법칙'

저자 룰루 밀러는 그릿이 추구하는 목표 너머 민들레의 법칙이 스며드는 민들레의 영토를 그린다. 룰루 밀러가 소개하는 민들레의 원칙은 이렇다.

"자연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226~ 227쪽)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연계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이 물고기를 분류하면서 계층구조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조던에게 인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퇴화되었다고 생각한 인간은 제거되어야 마땅했기에 열렬한 우생학 신봉자가 되었다. 그는 그릿 하게 매달렸던 목표 너머를 보지 못했고, 목표로 가면서 주변도 둘러보지 못하는 과오를 범했다.

룰루 밀러는 우리 인간도 민들레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본다. 다양성이야말로 진화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생명체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단일대오로 돌진하면서 진화를 이룩해 온 것이 아니다. 인간 또한 각자의 길을 가면서 서로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존재가 되면서 역사는 발전해 왔다.

그건 그렇고 책 제목이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까? 말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현대의 분기 학자들이 밝혀낸 진화 계통도에 따르면 조류도 존재하고 포유류도 존재하지만 어류는 콕 집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류라고 퉁친 분류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긴 말 필요 없이 인간의 손도 물고기의 지느러미에서 진화했으니까. 아무튼, 엄밀하게말하자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일 것이다.

언젠가 스탠퍼드를 둘러보러 갔을 때, 데이비드 스타 조던 건물을 보았는지, 보지 않았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이 책을 읽고 갔었더라면 그 건물은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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