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웃기는 판타지 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전미연 옮기, 열린 책들, 2020)은 설정이 개웃기는 소설, 아니 희곡이다. 전작 <인간>에 이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두 번째 희곡이다. <심판>은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유치 찬란한 이야기였다. 판타지 소설이 진중하면 그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너무 유치 찬란해도 곤란하다는 걸 심판하는 희곡 소설이라고 할까.
3막으로 구성된 희곡 <심판>은 1막에서 주인공 아나톨 피숑 판사가 폐암 제거 수술 중에 혼수상태에 빠진다. 아나톨 피숑은 자신이 사후 세계에 온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변호사 카롤린을 만나고, 베르트랑 검사를 만난다. 그리고 아나톨 피숑이 피고인이 되어 얼떨결에 재판관 가브리엘 주제로 재판이 열린다.
2막에서는 아나톨 피숑의 생애를 두고 검사와 변호사의 심문과 변호가 시작된다. 여기서 웃기는 건 변호사 카롤린과 검사 베르트랑이 전생에서 이혼한 부부 사이였다는 거다. 카롤린과 베르트랑이 피고인을 심문하는 것인지, 자신들이 누구 잘못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는지를 두고 다투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으로 엉망진창으로 심리가 진행된다. 이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유머라고 해야 할까?
3막에서는 현생에서 잘못 살았기 때문에 천국의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아나톨 피숑의 다음 생을 선택하는 과정이 지루하게 진행된다. 현생에서 업보를 쌓지 않았으면 인간의 삶을 다시 사는 형벌이 면하고 천국에 머물게 된다.
심판 줄거리
그렇다면 아나톨 피숑은 현생에서 무엇을 잘못했길래 인생을 다시 사는 형벌을 받게 되었을까?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전개한 재판 심리에 따라 아나톨 피숑의 전생과 현생을 정리해보자.
먼저 영혼 번호 103-683의 아나톨 피숑이 살았던 무수한 전생은 이랬다. 고대 이집트 궁궐의 여인, 카르타고 항구에서 생선 내장을 빼던 사람, 앵글로색슨족 전사, 일본 사무라이를 거쳐, 직전의 전생은1861년에서 태어나 몽마르트르 몰랭 루주에서 춤을 추던 프렌치 캉캉 댄서였던 엘리자베트 루냐크였다.
엘리자베트는 길게 늘어뜨린 갈색 머리에 가늘고 날씬한 다리, 춤추는 모습이 어찌나 하늘하늘하면서도 경쾌했던지 잠자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나톨 피숑의 현생은 1947년 프랑스에서 출생해서 2007년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하루에 세 갑의 담배를 피워댔기에 폐암에 걸렸고, 주 35시간 제로 인력이 부족한 병원에서 하필이면 휴가철에 수술을 받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수술을 하던 담당의는 골프를 치러 휴가를 떠나고 만다. 수술을 하는 의사들의 대화도 유치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상황이 꼭 시트콤을 보는 듯하다. 시트콤적 상황은 소설 <심판>의 끝 문장까지 계속된다. ㅋ
아나톨 피숑은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을 만들고 많은 작품을 공연했다. 같은 연극반 솔랑주에게 남몰래 연정을 불태웠다. 대학에 가서도 자신의 열정을 좇아 연출을 하고 공연을 했다. 전생이었던 엘리자베트 루냐크가 피숑의 삶의 여정에 연극을 포함시켜 놓았으므로.
그러나 스물다섯의 피숑은 어느 날 밤, 뉴 블랙 파라다이스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자옥한 연기 속에 레이저가 빗발치고 음악이 쿵쾅거리는 가운데 한 여성을 만났다. 새벽 4시, 피로감과 술기운이 그를 나이트클럽 화장실로 이끌었고, 그 집단 환락의 장소에서 자제력을 상실한 채 그녀를 임신시켰다.
그래서 아나톨 피숑은 아이를 책임지기 위하여 뚱뚱한 그녀와 결혼했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연극배우가 아니라 판사가 되었다.
검사 베르트랑 심문에 의하면 판사가 된 아나톨 피숑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뚱뚱한 아내와 결혼하여 그녀에게만 충실했다. 부부는 전통적인 가치와 관습이라는 미명 하에 지극히 기본적인 쾌락을 차단한 채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베르트랑은 바람을 피워서라도 부부 관계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재판관 가브라엘은 검사 베르트랑의 주장을 거의 받아들여 아나톨 피숑이 자신의 연극 재능을 망각하고 인생을 허비했다는 걸 인정했다. 고교 연극반 솔랑주와 러브 스토리를 완성하지 않았고 옳은 배우자도 고르지도 않았다며, 피숑에게 인간의 삶을 다시 사는 형벌을 선고해 버린다.
결말(스포일러)
이어지는 3막에서 아나톨 피숑은 다음 인생을 선택하게 된다. 나라도 선택할 수 있고, 부모도 성별도 재능도 직업도 선택할 수 있다. 초등학생들이 읽으면 호기심을 가질 법한 이야기들이라 여기서는 그만 생략한다.
아무튼 아나톨 피숑은 새로 막 태어날 아기의 산모 속으로 시급히 들어가야 되는데 생떼를 부리며 버틴다.
여기서 웃기는 반전 아닌 반전이 일어난다. 휴정 때 아나톨 피숑은 재판장 가브리엘을 강제로 끌어안으며 유혹했고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었다.
피숑을 지상에 내려보내지 못하면 혼 날 것도 두렵던 차에 가브리엘은 천국의 재판관직을 아나톨 피숑에게 맡기고 피숑이 선택한 인생을 대신 살기 위해 지상으로 다이빙한다.
심판 에필로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데뷔작 <개미>는 국내에서 대박을 터트렸고 그 후로 그가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한국 독자들이 판매량의 절반은 언제나 책임져 주었다. 그는 한국에 두 번 왔고 소설마다 한국인도 등판시켰다. 그런데 소설 <심판>에는 한국이라는 두 글자를 발견할 수 없다. 약발이 다 됐다고 생각한 걸까? ㅎ
그러나 희곡 소설 <심판>에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진부한 판타지 클리셰들은 여전히 반복된다. 베르트랑 검사와 카롤린이 심문과 변화는 걸 보면 법정을 견학 온 초등학생들이 남자와 여자 중에서 누가 더 우월한 동물인지, 누구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는지 유치하게 말싸움하는 걸 지켜보는 것 같다.
카롤린은 남자를 성욕에 굶주린 동물이라고 공격하고 베르트랑은 그걸 또 자랑으로 여기는 뻔뻔함을 과시한다. 심지어 천국의 재판관마저 아나톨 피숑의 강압적인 유혹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세계관도 아마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 시리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