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이토의 <달팽이 식당>(권남희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2)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을 당한 여주인공이 작은 식당을 하면서 다시 일상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이다. 2010년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다가 작년에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도쿄 야나카에서 앤티크 기모노 가게를 하는 시오리가 유부남 기노시타 하루이치로를 만나 사랑에 빠져드는 이야기를 담은 오가와 이토의 <초초난난>(2011)을 잔잔하게 읽었다는 기억에 달팽이 식당도 읽어보았다.
오가와 이토는 상처받은 주인공을 담담하게 토닥거리는 힐링 소설들을 많이 썼다. 음식과 요리 이야기도 많이 한다. 이 소설도 상처받은 주인공이 요리를 하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자신도 안정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와가와 이토 프로필
1973년 야마가타현 출생. 1999년 <밀장과 카레>로 소설가로 데뷔했다. 2008년 첫 장편소설 <달팽이 식당>은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베트남어 등으로 번역 출간됐다. 2010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고 2011년 이탈리아의 프레미오 반카렐라, 2013년 프랑스의 외제니 브라지에 등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라이온의 간식》, 《패밀리 트리》, 《츠바키 문구점》, 《반짝반짝 공화국》, 《따뜻함을 드세요》, 《트리 하우스》, 《초초난난》, 《바나나 빛 행복》, 《이 슬픔이 슬픈 채로 끝나지 않기를》, 《양식당 오가와》, 《인생은 불확실한 일뿐이어서》 등이 있다.
줄거리
링고의 인도인 남자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날랐다. 돈이며 가재도구, 남김없이 깡그리 들고 튀었다. 링고가 티르기예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니 집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텔레비전도 세탁기도 냉장고도 형광등도 커튼도 현간 매트도 모조리 사라졌다. 링고가 호실을 착각했나 잠시 생각할 정도였다.
고생해서 힘겹게 얻은 이 집에서, 밤이면 그와 한 이불속에서 나란히 손을 잡고 잤는데. 요리사가 꿈이었던 링고가 매달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쪼개서 사 모은 밥그릇도 토스터도 쿠킹 시트도 삭 다 사라졌다. 심지어 할머니와 둘이서 하나하나 정성껏 닦아 담근 추억의 매실장아찌조차 병째 사라지고 없었다.
링고는 남자친구와 식당을 창업하기 위해 매일 아침 주먹밥을 만들어서 점심을 때웠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은 돈은 벽장에 차곡차곡 모아두었었다. 벡만 엔 짜리 봉투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세상에 이런 야비한 놈이 또 있을까. ㅠ
다행히 현관문 옆 가스계량가 있는 좁은 공간에 보관해 둔 할머니의 겨된장 항아리는 그대로 있었다. 문자 그대로 말문이 막히는 상황이었으므로 링고는 실어증에 걸렸다. 링고는 겨된장 항아리 하나만 달랑 안고 열다섯 살 봄에 등을 돌린 이후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던 고향으로 가는 심야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달팽이 식당>의 도입부를 읽고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나쁜 놈들이 참 많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링고는 고향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남자친구를 키가 크고 눈동자가 아름답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링고는 왜 이리 순진하기만 한 걸까. ㅠ
링고의 고향은 유방산 자락에 위치한 외진 산골 마을이었다. 도톰하니 부푼 산이 두 개, 서로 기대듯이 서 있는 유방산. 멀리서 보면 누워 있는 여자의 유방처럼 보인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옛날부터 유방산이라고 불렀다. 유방과 유방 사이를 잇는 계곡에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번지 점프대가 있었다. (목표에도 유방산이 있긴 하다)
건설회사 사장 네오콘을 애인으로 둔 엄마는 고향마을에서 술집 '아무르'를 하며 교태를 부리고 손님을 상대하느라 언제나 바쁘다. 십 년 만에 딸이 돌아왔지만 엄마는 식비와 난방비, 월세를 내고 반려돼지 엘메스를 돌보는 조건으로 같이 사는 것을 허락했다. 세상에 이런 나쁜 엄마가 있었다니. ㅋ
링고는 창고로 쓰는 가건물에 작은 식당을 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옷을 벗겨 알몸이 된다 해도 요리를 만드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는 링고였다. 다행히 창고를 빌려달라는 말에 엄마는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라며 선뜻 승낙했다.
식당 이름은 <달팽이 식당>으로 했다. 느리게 가자는 의미였다. 이메일이나 팩스로 면접을 봐서 하루 한 팀만 받기로 했다. 세상에! 면접을 봐서 손님을 받는 식당도 있었나? ㅠ
첫 번째 손님은 인테리어를 꼼꼼히 도운 구마 씨였다. 두 번째 손님은 수십 년째 항상 상복을 입고 다니는 첩 할머니였다. 첩 할머니는 달팽이 식당에서 식사를 한 그날 밤 평생 못 잊어한 그 사람을 꿈속에서 만났고 상복을 비로소 벗었다. 달팽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사랑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번져갔다.
손님을 위해 식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는 링고의 얼굴에 행복이 잔잔하게 흐른다. 일본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들은 링고의 레시피에 따라 음식을 만들면 맛있을 것 같았다.
빵에 물기가 스며드는 것을 막고 맛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빵 표면에 수증기를 쐰 밀크초콜릿을 얇게 발랐다. 쌉쌀한 다크초콜릿보다 밀크초콜릿 쪽이 크림과 과일의 궁합이 좋다. 한입 물면 푹신푹신한 빵 사이에서 과일즙이 좌르륵 넘치고, 씹는 동안 은근하게 초콜릿 맛이 입안에 퍼진다.
달팽이 식당 134쪽, 링고의 레시피 중에 하나
링고의 정성스러운 요리는 거식증에 걸린 토끼조차 다시 식욕이 돋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거식증에 걸린 토끼라니! 토끼가 아프면 수의사에게 보내야 하는데. ㅋ
아무튼, 달팽이 식당의 마지막 손님은 엄마의 손님들이었다. 엄마는 고교 시절에 사귀었던 일 년 선배 슈와 약혼했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엄마는 삼십여 년이 훌쩍 흘러 말기암에 걸리고나서야 슈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링고는 엄마의 소원대로 반려돼지 엘메스를 혼을 담아 요리해서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엘메스를 요리하는 묘사가 꽤 길다. 생명과 사랑은 순환한다는 의미로 반려돼지를 잡아먹는다는 설정인가 본데, 이 부분이 <달팽이 식당>에서 가장 뜨악했다. 소설의 중반부부터 너무 대놓고 동화처럼 전개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반려동물을 잡아먹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니지 않나? ㅠ
그리고 어느 날 비둘기가 쿵하고 유리창가에 부딪져 죽었고, 링고는 '죽음을 헛되이 하면 안 돼.'라는 유언같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다. 링고는 무아지경으로 비둘기 요리를 해서 입에 넣어 삼킨다. 그때 "오"라는 탄성이 나왔다. 링고의 몸에 목소리가 돌아온 순간이었다.
그리고 링고는 다짐한다. 먹고 나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요리를 만들자, 먹고 나면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는 요리를, 앞으로도 계속 만들자.
독후감
개정판 달팽이 식당에는 단편 '초코문'이 합본되어 있다. 달팽이 식당의 요리를 먹으면 사랑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게이 커플의 이야기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엉망이 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붙어있는 단편 초코문이 그나마 조금 남아있었던 잔잔한 여운을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ㅋ
내가 읽은 일본 여류 작가들의 소설에 한정해서 보면, 3대 여류 작가니 일본을 대표한다는 여류 작가들의 문장력이나 감성, 작품 구성능력이나 문학적인 완성도 등이 한국 여성 작가들에 비해 좀 형편없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달팽이 식당>도 초반부는 그러대로 읽을 만했는데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설정도 이상해지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렸다. ㅋ
아무래도 내가 꽤 괜찮은 일본 여류 작가를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모양이다. ㅠ 아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으니 어떤지 모르겠다. 영화 <카모메 식당>은 참 좋았는데, 그런 느낌이 들지 모르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