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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작가 정혜윤 PD, 슬픈 세상의 기쁜 말

by 로그라인 2022. 9. 13.

정혜윤 PD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위고, 2021)은 인간의 삶이 자연의 시간과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정직한 어부, 여든다섯 살이 되어서 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 재래시장 야채장수 언니, 세월호 유가족, 달, 붉은가슴도요새, 돌고래, 반딧불이이다.

정혜윤 작가가 귀하게 만난 사람들과 자연의 한 모퉁이들이다. 이들 주인공들은 우리 곁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거나 사라지고 있다. 정혜윤 작가의 글을 읽으면 PD가 아니라 이야기꾼이 천성에 더 맞는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정혜윤 작가는 특별한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우리에게 마법 같은 힘이 있음을 믿으며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들을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 담았다.  

작가 정혜윤 PD

저자 정혜윤은 CBS 라디오 프로듀서이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으로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자서로는 <삶의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아무튼, 메모>, <앞으로 올 사랑> 등이 있다.

우리의 입은 크게 봐서 세 가지라고 정혜윤은 말한다.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 현재는 주로 먹는 입만 보여주는 시대라는 말은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앞날에 출구가 없다고 여겨질 때 문화는 과하다 싶게 먹는 것에 몰두한다고 말이다. 먹방이 대세를 점령한 지 오래다.

정혜윤은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낭비하지 않게 말하는 입과 사랑하는 입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우리 인간이 지금과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증거들이 넘친다.

책표지
책 표지가 좀 그렇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목차의 첫 꼭지는 '자유, 약속, 품위'이다. 세 단어로 나열된 키워드를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연상되었지만 하루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자유, 약속, 품위'는 남도의 어촌에서 성실하게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가는 한 어부의 이야기이다. 그 어부는 고아로 살다가 군대를 갔고, 면회오는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다. 어느 날 한 여고생에게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사진만 한 번 주고받고는 만나지 못했다.

그 편지를 받은  지 30년이 좀 안되었을 때 어부는 그 여고생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뒤로 두 사람은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 안부를 챙겨주곤 했다. 각자가 사는 도시의 중간 지점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고, 서로의 집을 한 번씩 방문했다. 혼자 살던 둘은 그렇게 어부 부부가 되었다.

아, 이렇게도 소설 같은 사랑 이야기가 있었다니, 바다 위에서 서로 의지하며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은 동화 속 풍경을 보는 듯했다. 이십 대 시절, 군대에서 편지만 주고받다, 30년의 세월이 흘러 만나다니, 그렇게 낭만적일수가 없었다. 각색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뭐 어떠랴. 

작가 정혜윤은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지극한 슬픔과 극복될 수 없는 비극 뒤에 남겨진 이들의 삶에서 기적처럼 피어오르는 연대와 희망들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99쪽

작가는 프랑스에서 슬픈 사람들이 그 단어 아래 모여, 그 단어를 임시 피난처 삼아, 다시 인간들 틈에서 짧은 위안을 구하고 어두운 마음을 헤집어 해야 하는 말을 찾아냈다. 그 단어는 바로 '연대'다.

연대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알게 된 모든 것을 당신께 알려드릴게요.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도울게요. 당신은 나보다 덜 슬프도록요.

그토록 깊게 슬퍼한 사람이 타인의 행복을 바란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작가는 놀란다고 한다. 내가 이토록 슬픈 일을 겪었으니 제발 당신은 겪지 마세요라는 마음. 그런 간절한 마음들이 연대가 이루어질 때 우리 사회는 비극을 조금이라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160쪽

정혜윤에 따르면 천국에서는 한 가지 질문만 한다고 한다. "한 번뿐인 네 인생을 가지고 그래 무엇을 했느냐"고.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는 각자가 더 잘 알 것이다. 돈은 얼마나 벌었고, 어디까지 출세했는지를 묻는 말은 물론 아닐 것이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세상은 변해야 한다. 위험에 처한 생명에 대하여,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들이 모이면 우리 사회는 그만큼 희망으로 빛난다. 작가는 산 자의 귀로 그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 듣겠다고 다짐한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내 인생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인생은 어차피 딱 한번이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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