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헤이우드 첫 장편소설, '캑터스'
사라 헤이우드의 캑터스(김나연 옮김, 시월이일, 2021)는 자신의 독자적인 삶을 꿈꾸었던 마흔다섯 여성 직장인, 수잔이 예기치 않은 임신과 엄마의 유언장을 계기로 진정한 삶의 방식을 깨달아 간다는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이다. '캑터스 cactus'는 선인장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수잔이 곧 캑터스라는 설정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롭은 선인장은 적에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시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분을 간직하기 위해 잎이 아닌 가시로 진화한 것이다, 선인장의 두꺼운 표면과 잘 발달한 뿌리, 넓은 다육질의 줄기도 수분을 저장하고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고 수잔에게 설명한다.
소설 캑터스는 삼분의 일 지점까지는 정말 몰임감 있게 잘 읽혔다. 오랜만에 발견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주인공 수잔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수잔은 어떤 연유로 어떤 가시를 지니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 같은 것에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캑터스는 소설 중반부부터 어, 설마?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지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흥미의 반감기가 무섭게 작동하는 소설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예상을 하나도 빗나가지 않는 종반부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사라 헤이우드
영국 버밍엄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한 후, 런던과 버컨헤드에서 사무변호사로, 리버풀 톡스테스에서는 법률자문가로 활동했다. 현재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리버풀에 살고 있다.
캑터스는 사라 헤이우드의 첫 번째 장편소설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살아가는 수잔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용기 있게 '나'를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우며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 대해 보여주는 성장 스토리다(책날개 발췌 인용)
캑터스 책날개를 보고 좀 웃음이 터졌다. 아니, 마흔다섯 여자가 성장을 하다니? 하는 생각.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더구나 스무 살이 넘어가면 성격이 변할 확률 거의 제로라는 게 정설이지 않던가?
뭐, 어쨌든 이 소설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이고 15개국에 판권 계약이 되었으며, 리즈 위더스푼 주연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지금쯤 영화가 나왔나 모르겠다.
캑터스 줄거리
수잔은 공공건설사업의 발주를 담당하는 공무원으로 마흔다섯 살 비혼 여성이다. 그녀는 법학을 전공했으나 변호사가 되지 않고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 로펌에서 변호사로서 불안정한 삶을 살기보다 월급이 안정적인 공무원의 삶을 택했던 것이다. 자기 힘으로 런던에서 어렵사리 집도 마련했다.
수잔은 그 흔한 SNS 계정, 그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고, 관심을 가질 마음도 없다. 수잔은 직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독자적인 자신만의 삶을 위해 자신의 주변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살아간다.
그런 수잔에게도 이따금 만나 즐길 수 있는 '파트너'는 있었다. 그 남자와는 비혼을 전제로 이따금 만나 잠자리만 갖고 서로의 감정은 침범하지 않기로 한, 일종의 계약 연애 같은 거였다. 그 남자, 리처드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수잔은 자신의 독립적인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그와의 관계도 신속하고 깨끗하게 정리해버렸다.
어느 날 새벽 5시 반, 남동생 에드워드가 엄마의 사망 사실을 전화로 알렸다. 수잔은 <이방인>의 뫼르소와도 같이 엄마의 사망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매일 아침 루틴대로 선인장을 돌보고는 출근을 한다.
며칠 후, 수잔은 남동생 에드워드가 장례식 준비로 볼스 헤드라는 펍에 딸린 방을 준비했다는 말을 듣고, 기겁을 하며 엄마의 장례식을 위해 버밍엄으로 향한다. 장례식 날, 펍에 모인 친척들은 술 취한 남동생 에드워드의 추태에 모두 눈살을 찌푸리며 하나 둘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수잔은 무엇보다 엄마가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유언장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분개해하며 동생이 고령의 엄마를 협박하여 그런 유언장을 작성하게 했다고 의심하면서 상속재산 분할 청구 소송에 착수한다. 엄마가 남긴 유언장은 이랬다.
자택은 수잔과 남동생이 공동 상속을 하되, 남동생에게 영구 거주권을 부여한다. 즉, 엄마가 살던 집은 남동생이 그 집에 살지 않고 매도를 했을 때에만 수잔은 자신의 몫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유언장이었다. 웃기는 건, 남동생이 집을 처분하지 않으면 남동생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봤을 땐, 그래도 뭐 아들딸 구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잘 분배했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수잔 입장에서는 그 철천지 원수 같은 남동생이 집을 팔지 않으면, 엄마가 남긴 주택에서 땡전 한 푼 건질 수 없으니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수잔은 예기치 않은(리처드와의 관계에서 콘돔을 썼지만 피임이 되지 않았다) 임신이었지만 아이를 낳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를 출산하기로 결심한다. 수잔이 임신한 사실을 자신의 동기이지만 이제는 그녀의 상사가 된 트루디에게 알리자 까칠했던 그녀가 반색을 하는 것을 보고, 수잔은 의외라고 생각한다.
푼수 같았던 이웃집 싱글맘도 수잔의 임신 사실에 자신이 임신한 거처럼 좋아한다. 그리고 케이트는 수잔더러 너무 흑백논리에만 갇힌 페미니스트가 되지 말고, 우리 모두 약한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감정을 일부러 감추지 말고 파티에도 다니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잠자리만을 함께 했던 리처드가 나타나 양육비는 물론이고, 자신이 아빠 역할을 하겠다고 제안까지 한다. 심지어 청혼까지도. 수잔은 자신의 독립심을 위해 양육비를 거절하다 한 발 물러서 아이 양육비는 그렇담, 각각 절반씩 부담하기로 합의한다.
수잔이 남동생과 한 편이라고 생각했던 에드워드의 친구 롭도 임신한 그녀에게 살갑게 굴기 시작한다. 상속재산 집행인인 변호사도 그녀와 에드워드의 사이에서 소송을 하지 않고 중재를 통해 해결을 보려고 노력하는 눈치다.
그러나 수잔은 그 모든 호의의 배경을 의심하면서 소송을 계속해 나간다. 재판에 유리한 진술서를 받기 위해 엄마의 이웃집 노부부와 목사를 만나고, 엄마의 의료기록도 확보한다. 수잔은 엄마가 혈액 치매를 앓았다는 의료기록을 보고 동생을 더욱 의심하며 자신의 승소 가능성에 기뻐한다.
캑터스 결말, 스포일러
자, 사라 헤이우드는 장편소설 캑터스 초반부에서 쌓아 올린 주인공 수잔의 캐릭터를 후반부에서는 그녀에게 마법 가루라도 뿌려져 진 것처럼 모든 주변 인물들이 마치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여기서부터는 미련 없이 스포일러를 마구 뿌릴 테니까 이 소설을 읽어보실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고, 나머지는 독후 읽어 주시기 바란다.
캑터스 결말부에서 수잔은 한국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법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수전의 생물학적은 엄마는 이모라는 것, 그리고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자기 생부가 맞다는 것. 그럼에도 자기 양엄마는 수잔을 위해 재산을 남겼다는 것. 에드워드의 친구 롭이 끝내 수잔에게 청혼한다는 것, 수잔은 페미니즘이 뭐고 다 내팽개치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것.
사실 캑터스 결말부는 읽기가 상당히 곤혹스럽다. 설마, 에드워드까지 사실은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수잔 혼자 오해하고 있었다가 수잔이 비로소 깨닫고 설마 화해하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둘은 좋은 게 좋다고 서로 사이 좋게 화해하고 소송도 취소해버린다. 훈훈한 마무리다.
캑터스를 다 읽고 나면 수잔은 지 혼자 주위 사람들을 오해하고 세상과의 문을 잠그고 살아가다 임신과 엄마의 죽음, 그리고 출산을 계기로 마흔다섯 나이에 주변인들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거다. 수잔이 마흔다섯까지 그렇게 힘들게 진화시킨 선인장의 가시는 그녀의 깨달음으로 인하여 가시가 퇴화하여 다시 꽃으로 변신해 간다는 어이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수잔의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모두 마음씨가 착한데다 현명하기까지 하다. 천사도 그런 천사가 없다. 다 읽고 생각하니, 소설 초반부에 등장했던 수잔의 초등학교 선생마저도 수잔을 위하느라 교직을 박탈당했던 것이다. 당신은 살면서 혹시,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사실 알고 봤더니 당신을 위한 수호천사였다라는 걸 깨달았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훈훈한 마무리가 요즘 소설의 대세가 되었다. 손원평의 <아몬드>도 그랬고, 김호연의 <불편한 편의점>도 그렇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말할 것도 없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이건 소설도 될 수 없고, 실제 인생은 더더욱 될 수 없다. 이런 소설을 도대체 왜 쓰는 걸까? 이 소설을 읽고 위로받을 사람이 있을 거라고 과연 진심 생각하고 쓴 걸까?
소설 속에서 훈훈한 마무리를 한다고 해서 현생도 훈훈해지는 건 아니다. 아무리 좋은 게 좋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소설 아닌 소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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