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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상/시와 에세이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우리가 사랑한 광화문글판

by 로그라인 2023. 6. 12.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가 엮은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교보문고, 개정증보판 2020)는 1991년 1월부터 시작된 광화문 글판의 30년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광화문글판은 일 년에 네 차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 옷을 입는다. 광화문 글판은 누군가에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선사했고, 누군가에는 잠시 이웃과 인생을 돌아보는 여유를 선사하기도 했다. 

고 이어령은 "도심의 큰 건물에 구호나 속담이 아닌 문학성 풍부한 구절을 지속해서 노출한 경우는 외국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광화문글판은 대중에게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동시에 글판 서체 또한 다양하게 시도해 한글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책의 구성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그간 우리가 보아온 광화문글판 속 시인 9명의 인터뷰를 실었다. 시인 나태주는 광화문 글판의 시 <풀꽃>이야말로 오늘날의 시인을 있게 해 준 중요한 계기 가운데의 하나라고 회고했다. 광화문 글판에 풀꽃이 실리면서 책이 잘 팔렸고 강연도 자주 다니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나태주 시인이 초등학교에서 있을 때 아이들과 글짓기 공부를 하며 풀꽃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들에게 해준 말을 그대로 옮겨서 적은 문장이 시 <풀꽃>이 되었다는 일화를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시 풀꽃은 역대 광화문 글판 중에서 시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글판이 되었다.

책표지
책표지

1부에는 시인 정현종, 백무산, 장석주, 천양희, 이준관, 정호승, 허형만, 김사인 광화문글판 속 작품에 관한 이야기들과 근황들이 담겨 있다. 

2부 ‘우리가 사랑한 글판들’에서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수놓은 글판 이미지와 시, 노랫말, 동화, 에세이 등 광화문글판에 실린 글의 원문 전체를 만나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 <44>를 만나볼 수 있어 좋았다. 시를 읽으며,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왜 우리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라는 회한도 묻어났다.

44, 파블로 네루다
​​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 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좇는 거지?​

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는 더없이 반가웠다. 이 시는 2015년 겨울 광화문 글판에 실렸다. 그녀는 자신이 가본 적 없었던 나라의 큰길에 자신의 시가 실리리라는 걸 예감했을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춘향전을 읽고 열녀 중의 열녀라고 감탄한 서평을 남긴 인연이 이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 2015년 겨울 광화문 글판

두 번은 없다 Nic dwa razy,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은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게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3부 ‘우리가 사랑한 이야기들’에는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대상 수상작들과 광화문글판이 새 옷을 갈아입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광화문글판 제작과정

광화문 글판은 25자 안팎으로 문안을 선정하고, 글판 디자인 시안은 보통 30~40종에서 2~3종의 후보 시안을 추려낸 다음,  최종 시안을 결정한단다. 글판의 크기는 신문지 800배 크기로 가로 20m, 세로 8m로  출력에만 5시간이 걸리고 설치에도 4~5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긴 여정을 거쳐 탄생한 짤막한 문장은 보는 이에 따라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시가 지닌 힘이다.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를 다 읽고 나니, 한 권의 시선집을 감상한 것 같다. 광화문 글판은 어느덧 시민들에게 익숙한 문화콘텐츠가 되었다. 오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최근 광화문 글판 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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