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림태주의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웅진 지식하우스, 2021)는 말의 빛과 어둠에 관해 작가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정의를 내린 글들은 모은 에세이집이다. 프롤로그에서 림태주 시인은 내가 만난 최고의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시작한다.
“너였다. 지금껏 내가 만난 최고의 문장은. 나는 오늘도 너라는 낱말에 밑줄을 긋는다. 너라는 말에는 다정히 있어서, 진심이 있어서, 쉬어갈 자리가 있어서, 차별이 없어서,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나는 너를 수집했고 너에게 온전히 물들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는 2021년 11월 10일 초판 5쇄를 찍었다. 2021년 10월 15일 초판 1쇄를 발행했으니 채 한 달도 안 돼 5쇄를 찍은 에세이다. 내가 만난 최고의 문장이 '너'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작가 림태주 소개
림태주는 시집 한 권 없는 무명 시인이다. 시적 감수성으로 쓴 산문집, 《이 미친 그리움》이 화제가 되었다. 페이스북에서는 인기 작가로 행세하며 팬클럽도 보유하고 있다. 시인이 살아낸 다채로운 사랑의 사계를 《그토록 붉은 사랑》에 담아냈다. 생애 처음으로 선보이는 시들을 낭송해 수록했다.‘소리 산문집’은 잔잔하고 붉다.
- 인터파크 도서 작가 소개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를 읽는 내내 종이로 인쇄된 블로그 글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만 문법에 어긋나지 않고 정성을 들인 글들을 보기 좋게 편집하여 출판한 글이라는 인상이었다.
내 취향의 글은 아니었다. 문장에 물기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른 남성 작가인데, 왜 이렇게 소녀처럼 감성이 대책 없이 쏟아질까? 언젠가부터 이런 류의 글은 읽기 힘들어졌다. 감성 과잉의 글은 읽으면 나도 모르게 나의 낯이 민망해지고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럼에도 끝까지 지긋이 읽었다. 사서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이어서다.
"이 책 요즘 인기 되게 많아요.~"
"읽어 보셨어요?"
"호호, 아뇨. 읽으시고 말씀해 주시라고요. 다른 분들에게 추천할 때 참고하게요."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감상문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작가가 프롤로그에서 "황당하다고 힐난하거나 틀리다고 단정하지 말고, 독특하고 색다르다고 받아들여 준다면 기쁘고 안심되고 보람 있겠다."라고 했는데, 딱 그 말이 맞다고.
작가는 '마음의 말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꼭지에서 가슴어라는 외국어가 있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가? 가슴어라니, 도대체 뭐지? 하고 작가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일상어는 머리로 이해하는 언어이지만 가슴어는 머리로는 이해되지도 들리지도 않는 언어라고 한다.
일테면 "아빠, 나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돼?" 이런 게 가슴어에 해당한다고. 딸아이가 가슴어로 말한 걸, 작가는 머리로 들었고 머리어로 답한 걸 후회한다. "안 돼. 학교는 가기 싫다고 안 가고 그러는 데가 아니야." 그럼 가슴어로 말한다면? 작가에 의하면 학교는 빠져도 되는 곳이고, 안 가고 싶은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이므로 그걸 물어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는 작가의 애교로 봐줄 수도 있겠는데, '사랑하지 않는 것도 사랑이다'라는 꼭지에서는 아이들이 맨날 강아지를 키워볼까 말했지만, 작가는 개를 좋아하면서도 개를 키우고 싶다는 마음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 사랑에는 준비도 필요하고 여건도 필요하니까. 작가는 아직 개를 보살필 수 있는 있을 만큼 성숙했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에 개를 키워지 못했다고.
그래서 작가는 개를 키우지 않는 것도 사랑이라고 믿는다, 함부로 사랑하지 않는 것도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을 참아내는 것도 때로 사랑보다 더 좋은 사랑일 수 있다고 믿는다고 결론 내린다. 이는 개를 좋아하지만 그 좋아함을 참아내고 있다는 작가의 말인데, 이는 그야말로 자기 합리화의 궤변이 아닌가. 개를 키우기 싫으면 키우기 싫다고 당당하게 말하면 될 것을 작가들은 꼭 이렇게 돌려 말한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떠나보낸다", 또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라는 뻔한 말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사랑이 과연 그런 걸까? 반려동물을 키우면 귀찮고 성가시기 마련이다. 경제적 부담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반려동물을 키울까? 그걸 감수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걸 감수할 자신이 없으면 개를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작가는 왜 그럴듯하게 감성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걸까? 요즘은 돈만 인플레 되는 게 아니고, 말과 글도 그 어느 때보다 인플레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부담스럽게 친절하고 지나치게 착한 척하며 살아가고 있다. 감성 과잉의 글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유다. 물기를 쫙 짜내고 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빈껍데기의 글들에게 보여줄 참을성이 바닥난 늙은이가 나도 되고 만 것이다. ㅠ
프롤로그에서 작가가 걱정한 대로 너무 비판적인 리뷰만 남기는 것 같아 긍정적인 부분도 인용한다. 작가는 인디어 유트족의 잠언시 내 뒤에서 걷지 마라를 인용한다.
작가는 인디언 유트족 잠언시에서 말하는 '그대'가 자신의 영혼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사상이나 힘일 수도 있는데, 자신은 '그대'를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의 말이 나보다 빠른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나의 말이 나를 앞서거나 나보다 뒤처지지 않고 나와 나란히 걸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작가는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발설되는 통제 불능의 말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얼마나 헛헛하고 부질없는 공감과 리액션의 말들이 난무하는가"라고 한탄한다.
내 뒤에서 걷지 마라가 항상 지혜일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시대만큼은 적어도 참고할 만한 잠언이다. 과도한 공감과 격한 리액션이 그 어느 때보다 난무하는 시대이므로. 그러나 인생은 때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한시도 잊지 마시라.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면서.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뛰노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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