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감상문
영화를 본 지 꽤 되었다. 하루에 영화 한 편은 보자,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낸 적도 있었다. 영화도 부지런해야 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걸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 듀나의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구픽, 2022)는 당신 스스로 영화를 즐겨보라며 채근하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듀나(DJUNA)는 희귀한 SF작가이다. 듀나는 필명이고, 성명과 나이 등이 알려지지 않은 소위 얼굴 없는 작가이다. 출판사에서도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그간 듀나의 SF 소설을 몇 편 읽었는데 제목이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니 그저 그랬던 것 같다. 경어체로 쓰인 에세이는 이상하게 집중하기 어려웠는데 이 책도 그랬다. 신변잡기식의 에세이가 아닌 경우에 경어체를 쓴 책들은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노골적으로 환심을 구걸하는 것 같아 알수 없는 거부감이 절로 느껴진다고 할까.
작가 듀나 소개
1992년부터 하이텔 과학소설 동호회에 짧은 단편들을 올리면서 경력을 시작했다. 소설과 영화 평론 등 여러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SF작가.
소설로는 《평형추》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 《민트의 세계》 《대리전》 《태평양 횡단 특급》 등이 있고, 을 썼으며,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가능한 꿈의 공간들》 등의 논픽션을 썼다. 《평형추》는 2021년 SF어워드에서 장편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우리가 옛날 영화를 찾는 이유
듀나는 우리가 왜 옛날 영화를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고전이라고 부르는 영화들이 잊히기엔 지나치게 어리다는 이유를 들었다. 리미에르 형제가 세계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을 찍은 것이 1895년이니까 영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듀나는 또 우리가 옛날 영화를 보아야 할 다른 이유로 모든 영화는 다 옛날 영화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영화가 한때 현재였던 과거의 조각들을 자르고 붙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데, 작가는 이 말을 말장난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말은 말장난이 맞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대화도 과거의 상대방과 하는 대화일 뿐이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상대방의 얼굴이 우리의 시상에 잡히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목소리가 우리 귀에 도착하는데도 시간이 소요되므로 상대방의 얼굴도, 소리도 모두 과거인 셈이다. 듀나는 원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옛날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 따위는 따로 없다. 작가는 지금의 영화만 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영화적 체험이 과거의 영화들 속에 있다고 부연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도 그저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는 문제니까 말이다.
작가처럼 영화 평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작품을 읽고 공감과 감동을 받고 즐길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꼭 고전 소설이다, 현대 소설이다, 가릴 것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전 소설을 찾고 옛날 영화를 찾는 이유는 긴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디어낸 작품이 아무래도 좋은 작품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바쁜 일상에서 어렵사리 시간을 내서 봤는데 꽝이라면 시간이 아까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역설적이게도 해마다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수의 영화와 소설들은 우리가 좋은 작품을 만난 확률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더 고전으로 눈을 돌리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 듀나는 걸작 리스트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걸작만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보면 시각이 협소해지고 빈곤해지기 때문에 고전 리스트에 속하지 못하는 영화 - 형편없는 영화, 평범한 영화를 보는 것 역시 중요한 영화적 경험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이러한 관점에 반대한다. 영화를 공부하거나 영화 평론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것저것 잡다한 영화에서도 뭔가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할 것이지만 일반 독자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0편도 다 못 보는 판국에 잡다한 영화까지 챙겨볼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의문이다.
아무튼 듀나는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에서 작가 특유의 관점으로 옛날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작가가 말한 대로 우리는 이상하고 낯선 영화를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걸작 영화들은 어느 정도 봤고 영화의 지평을 좀 더 넓히고 싶은 영화광들에게는 이 책이 하나의 참고가 될 수도 있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