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의 쓰는 기분(현암사, 2021)은 어느 날 문득 시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독자들에게 보내는 연서 같은 에세이이다. 시를 읽긴 읽었는데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나도 과연 시라는 것을 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는 초심자들을 위한 시 세계의 가이드북 같은 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4부로 구성된 쓰는 기분은 1부 '우리가 각자의 방에서 매일 시를 쓴다면'에서 시를 쓰는 마음과 시를 감상하는 방법, 시의 소재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부 작업실에서는 시적 몽상과 글쓰기, 삶에 대한 산문을 담았고, 3부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는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4부 '질문이 담긴 과일 바구니' 역시 초심자들을 위한 작가 나름의 시 쓰기에 대한 방법론을 Q&A 형식을 빌어 이야기한다.
시인 박연준 소개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 산문집으로 『소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모월 모일』 등이 있다.
작가 박연준은 시로 등단을 하였지만 최근에는 에세이를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쓰는 기분은 습도가 매우 높은 문장들이 찰랑찰랑거린다. 소녀 감성이라고 할까? 그런 문장들을 읽으면 손발이 좀 오그라든다. 내가 메말라서 그런가. 아무튼 나는 물기가 많은 문장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박연준의 쓰는 기분을 읽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시인 박연준은 1980년생이다. 2015년 초, 시인이 35살이 되었을 때 25살 연상인 1955년생 장석주 시인과 혼인신고를 했다. 따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 문단에서도 결혼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2015년, 두 사람의 시드니 여행기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난다 출판사, 2016)가 출간되며 결혼 사실이 비로소 알려졌다.
박연준과 장석주의 러브스토리를 축약해보면 박연준이 동덕여대 문예 창작과를 다니고 있을 때, 장석주는 소설 창작론 등을 강의했다. 학생과 제자로 만난 사이다. 박연준이 '얼음을 주세요'로 등단했을 때 서로 이성으로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쓰는 기분, 러브스토리의 씨앗을 찾아
이 사람에게 제가 언제 마음을 열게 되었나 생각해보니, 이렇게 시작하는 메일을 받고 나서였어요.
"네 이름을 발음하는 내 입술에 몇 개의 별들이 얼음처럼 부서진다."
(···) 메타포가 얼마나 힘이 센지, 사람 마음을 제멋대로 휘어잡을 수 있는지! 저는 이렇게 코가 꿰이고 말았다.
- 쓰는 기분, 30 - 31쪽
두 사람은 비밀 연애를 10년 동안 했다. 장석주는 결혼을 망설였지만, 박연준이 밀어붙였다. 결혼 사실이 알려지자 주위 많은 사람들이 힐난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복을 해주어 시인은 안도했다.
25살이라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사랑의 영토에 승리의 깃발을 어떻게 꽂을 수 있었을까? 그 단서를 찾기 위한 것이 이 책을 읽은 이유다. 박연준의 산문을 읽어보니 박연준에게 시와 장석주는 종종 동일시되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순진함이요.
모든 순진함은 생각하지 않는 것······"
*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민음사, 2018
시인 박연준은 이 문장을 읽던 순간을 기억한다고 했다. 몸의 세포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같았다고. 그리고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사랑에 빠진 적이 있냐고. 순진하게 사랑에 빠진 적이. 사랑으로 인해 내가 입게 될 상처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사랑하는 일을 해 본 적이 있느냐고 말이다.
스물다섯 무렵 시인은 기댈 데가 시밖에 없었고, 시를 쓸 때면 시가 곧 방패이자 문이며 오롯한 세상이 되어주었다고 했다. 작가 박연준은 시를 순진하게 사랑하면서 시를 쓰라고 독자들에게 말했지만, 나는 작가가 말하는 '시'에 '장석주'를 대입해 보았다. 스물다섯 무렵 작가는 아마도 시와 장석주를 순진하게 사랑을 했을 것이다.
나는 장석주 시인을 나는 문학이다(나무이야기, 2009)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나는 문학이다는 한국문학 100년사에 바치는 장석주의 오마주다. 무려 1053쪽이다. 시인이 시 쓰기도 바빴을 텐데, 그의 열정에 감탄했었다. 이 책은 2017년, 704쪽 분량의 <한국 근현대문학사>로 개정판이 출간됐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유감스럽게도 쓰는 기분에서는 25살 연상 시인 장석주와의 러브 스토리가 발화된 씨앗을 이 두 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만족한다. 순진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보기 드문 귀한 일이므로. 두 시인은 드문 용기를 지녔으니 오래 사랑하면서 좋은 시들을 아마 오래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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