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신작 추리소설 <희망의 끈>(김난주 옮김, 도서출판 재인, 2022)을 다 읽었다. 465페이지의 두툼한 이 소설책은 목차도, 작가의 말이나 번역자의 말도 없이 곧장 내달리기 시작했다.
희망의 끈은 내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 되었다. 최근 작이라서 그런지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여성 비하적인 시선도, 장황한 수사 배경 설명도 많이 줄어 있었다.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도 형사들은 여전히 택배기사로 가장해 용의자들을 접촉한다든지 하는 등의 낡고 우스운 수사기법들을 자랑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걸 수사기법인 양 여러차례 추켜세운다. 이러한 쓸데 없는 내용들을 줄였다면 좀 더 매끈한 추리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여성 캐릭터 대부분은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나온다. 요시하라 아야코는 유서 깊은 료칸의 경영을 진두 지휘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비록 굴복해 그녀를 낳긴 했지만 동성애자로서 당당하게 살다 갔다.
요만한 구성이면 킬링타임 하기에는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희망의 끈은 추리 소설 본연의 퍼즐 맞추는 재미를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프로필
1958년 오사카 출생. 고등학교 때 추리소설 습작을 했던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로 일했다.
1985년 추리소설 <방과 후>로 에도가와란 포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1999년 <비밀>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갈릴레오 시리즈 중의 하나인 <용의자 X의 헌신>으로 2006년 제134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2012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주오코론 문예상을, 2013년 <몽환화>로 제26회 시바타렌자부로상을, 2014년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제48회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패러디한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원제 쿄코의 꿈 - 컴퍼니언 살인사건), <백조와 박쥐>, <공허한 십자가>,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방황하는 칼날>, <녹나무의 파수꾼>, <백야행>, <숙명>, <가면 산장 살인 사건>,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가가 형사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등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 중에서 반전이 가장 돋보이는 소설은 <위험한 비너스>(2017)↗이다. 반전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한 추리 소설이다.
희망의 끈 줄거리
프롤로그
건설회사에 다니는 시오미 유키노부는 아내 레이코의 설득에 못 이겨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에 있는 외가에 아이들을 놀러 보낸다. 딸 에마는 열두 살, 아들 나오토는 열 살. 나가오카시에 가기 위해서는 신칸센을 타고 전철로 갈아타야 한다. 유키노부는 초등학생인 아이들만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이 외가로 출발한 날 오후, 땅이 크게 흔들리고 건물 벽면이 붕괴되는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의 진원지는 니가타였다. 그 지진으로 에마와 나오토가 죽었다.
그 사고 이후 유키노부 부부의 일상은 공허함이 지배했다. 레이코는 플라워 디자이너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이 남기고 간 사진과 노트를 들여다보며 하루하루를 절망적으로 보냈다.
유키노부는 아내의 삶에 새로운 희망의 끈을 이어 주기 위해 아이를 갖자고 권하고 난임 전문 클리닉에 다니기 시작한다. 레이코는 불임치료 1년 만에 체외 수정으로 임신에 성공한다.
이후 <희망의 끈>은 15년 후로 훌쩍 점프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러한 전개를 즐겨 쓴다.
야요이 카페 살인 사건
지유가오카에 있는 카페 주인 '하나즈카 야요이'가 등에 칼에 꽂힌 채 카페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 나이는 쉰 하나, 칼날이 심장까지 찔렀고 사망 추정 시간은 오후 5시에서 9시 사이.
경시청은 살인 사건 현장에 비추어 원한이나 금전, 치정 등이 얽힌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보고 카페 주인 살해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수사에 돌입한다.
수사를 지휘하는 인물은 '가가 교이치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가가 시리즈'를 이끌어 온 바로 그 형사이다. 하지만 <희망의 끈>에서는 형사 '마쓰미야 슈헤이'가 주변인들의 수사를 맡는 주된 역할을 한다. 가가는 마쓰미야 형사의 선배이자 사촌형으로 등장하나 조연 역할에 그친다.
야요이 카페 살인사건 용의자들
형사 마쓰미야 슈헤이는 탐문 수사 결과, 하나즈카 야요이가 그 누구로부터 원한을 살만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기품 있고 단아한 여성으로 반듯하게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된다. 가가 형사는 하나즈카 야요이의 통화목록, SNS 등 끈질긴 자료 분석과 수사 상황을 종합한 끝에 하나즈카 야요이의 용의자를 두 사람으로 압축한다.
첫 번째 인물은 야요이의 전남편 와타누키 데쓰히코. 그는 십여 년 전 하나즈카 야요이와 이혼했다. 6년 전, 클럽 '큐리어스'에서 일하던 나카야 다유코를 만나 현재까지 그녀와 동거하고 있다.
와타누키 데쓰히코라는 위인은 인생 최대의 목적이 자신의 2세를 갖는 것이다. 그는 아이가 생기자 않자 하나즈카 야요이와 이혼했고, 나카야 다유코와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6년째 동거만 하고 있을 뿐, 결혼은 아직 하지 않고 있다. 즉 혼전 임신이 그의 결혼 조건이었던 것이다.
와타누키 데쓰히코는 하나즈카 야요이와 이혼 후 오랫동안 만난 적이 없었고, 그녀가 최근에 연락이 와서 딱 한 번 만나 근황 이야기를 했을 뿐이라고 진술한다. 마쓰미야 형사는 오랫동안 전남편에게 연락 없이 지내던 하나즈카 야요이가 왜 하필이면 죽기 얼마 전에 근황 얘기나 하려고 연락을 했을까 의문점을 갖는다.
두 번째 용의자는 카페 단골손님 시오미 유키노부. 프롤로그에서 소개했던 그 인물이다. 프롤로그에서 15년이 흐른 후, 현재 시점에서 유키노부는 아내 레미코를 백혈병으로 잃고 열다섯 살 딸 모나와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다.
시오미 유키노부와 하나즈카 야요이는 누가 봐도 연인관계로 보였는데, 그걸 애써 숨기려는 유키노부의 태도에서 마쓰미야 형사는 의아함을 느낀다.
한편, 마쓰미야 형사에게 유서 깊은 료칸의 주인 요시하라 아야코가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말기 암환자로 오늘내일하고 있으며, 아버지가 유언장에 마쓰미야 슈헤이를 아들로 선언했으며 그 유언장에 따라 마쓰미야는 그의 상속분을 청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자, 추리소설 희망의 끈이 제공하는 퍼즐은 여기까지이다. 이 퍼즐만 보고 독자들은 하나즈카 야요이의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들은 히가시노의 스타일 상 범인이 누구인지는 퍼뜩 감이 올 것이다. 그런데 왜 죽였을까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다음은 결말이다. 만약 이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동한 독자들은 여기까지만 읽고, 아래 결말은 <희망의 끈>을 다 읽은 후에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희망의 끈 결말(스포일러)
두 용의자, 와타누키 데쓰히코와 시오미 유키노부는 알리바이도 있었고, 살해 동기도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어 마쓰미야 슈헤이는 그 두 사람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기만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와타누키 데쓰히코 동거녀 나카야 다유코가 뜬금없이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그녀의 자백에 따르면, 전부인 야요이를 만나고 온 이후로 와타누키가 '입양 방법' 같은 걸 검색하며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하나즈카 야요이와 담판을 지으려고 카페로 찾아갔다는 것이다.
카페에서 하나즈카 야요이는 자신과 데쓰히코 씨 사이에는 아이가 있다, 다유코 씨는 다유코 씨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라, 아직 젊으니까 반드시 만남이 찾아올 거라고 말했고, 그 말에 빡친 다유코는 카페에 있는 칼로 그녀를 찌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마쓰미야 형사는 개인적으로는 료칸의 주인 요시하라 아야코와 이복 남매지간임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가 그를 만난다.
희망의 끈 트릭과 구멍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소설에서 던진 트릭은 시오미 유키노부의 딸 '모나'이다. 모나의 생물학적 부모는 와타누키 데쓰히코와 하나즈카 야요이다. 15년 전 병원 측의 어이없는 실수로 모나의 수정란이 레이코의 자궁에 이식되어 출산되었던 것이다.
마쓰미야 형사는 탁월한 촉을 발휘해 이 진실을 수사로 밝혀내는데, 독자는 도저히 알 길이 없는 속임수였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런 유치한 트릭을 쓸 줄은 몰랐다. ㅋ
카페 살인 사건 수사본부는 야요이 카페 입구 CCTV를 돌여보며 카페를 출입한 사람들을 탐문 수사를 했을 것인데, 나카야 다유코가 들어가는 장면만은 놓치고 말았던 모양이다. 추리소설 희망의 끈에서 용서할 수 없는 가장 큰 구멍이다. 일본 경시청 수사가 개판이든지. ㅋ
용의자였던 와타누키 데쓰히코는 자신의 생물학적인 딸이 누군지 밝히지 않고 야요이가 죽는 바람에 그 딸을 찾기 위해 야요이의 휴대전화나 SNS 등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녀의 사후처리를 자처했다. 마쓰미야 형사는 이혼한 그가 왜 사후처리를 자처하는지를 수사의 중요 단서로 삼았다.
데쓰히코가 바보가 아니었다면 수정란이 바뀌었다는 야요이의 말에 그들 부부가 다녔던 15년 전 불임 전문 클리닉을 찾아가 족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쉬운 길을 놔두고 야요이의 유품에서 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던 것이다. 두 번째 큰 구멍이다.
이 외에도 희망의 끈에는 자잘한 구멍들이 많다. 인생사가 그렇듯 소설도 인생사를 닮았으니 그런 구멍쯤은 제쳐두고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희망의 끈에 대해 한번쯤 음미해 보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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