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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공방/성장소설

춘란의 계절, 김선희 청소년 소설, 사랑과 학폭 사이

by 로그라인 2023. 3. 9.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 젊었을 때의 풋풋한 감정을 회상할 수 있어서 좋다. 김선희의 <춘란의 계절>(자음과 모음, 2022)도 그런 소설이다. 아, 짐작하셨겠지만 제목은 난초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여주인공 이름이 춘란이다. <춘란의 계절>은 여주인공 춘란의 사춘기 시절 사랑을 다룬 연애 소설이다.

청소년문학은 대체로 2/3 지점까지만 재미있다. 우리 인생에서 청년기가 가장 빛나듯이 청소년 소설 또한 그런 것 같다. 2/3 지점이 지나면 높은 확률로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가 갑자기 생기면서 훈훈하게 급 마무리하는 것이 청소년 문학의 특징이다.

작가 김선희 소개

1964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서울 예술 대학 문예 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쓰고 있다. 2001년에 장편 동화 <흐린 후 차차 갬>으로 제7회 황금 도깨비상을 수상했으며, 청소년소설 『더 빨강』으로 사계절문학상을, 『열여덟 소울』로 살림 YA문학상을 받았다.

책표지
책표지

춘란의 계절 줄거리

싱글아빠의 보살핌으로 자란 춘란은 유치원 시설부터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하며 중학생이 되어서도 외톨이로 지낸다. 우연히 같은 반 외톨이 강태승이 일진 서지우에게 폭행을 당하는 걸 목격한 춘란은 그와 단짝이 된다. 

어느 날 일진 서지우가 춘란과 강태승을 강제로 키스를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일이 있은 후 강태승은 학교를 자퇴하고 사라진다. 

고등학생이 된 춘란은 어느 날 같은 반 '신비'에게 반하게 된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탈의실에서 체육복을 갈아입고 있을 때 춘란은 신비를 향한 자신의 감정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자기가 정말 신비라는 아이를 좋아하고 있는지, 누군가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좋아하고 있는지를. 김선희 작가는 그 순간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춘란의 계절 63쪽
춘란의 계절 63쪽

"그 순간 수만 볼트의 전기가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짜릿했다. 그 짜릿함이 지나간 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면서 몸이 달뜨고 흥분됐다. 황홀한 기분은 교실에 돌아와서도 계속됐다. 그 기분을 하루 종일 음미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혹시 수만 볼트의 전기가 자신의 몸을 관통한 적이 있으신가 궁금하다. 나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 적이 하도 오래되어버려서 내 인생에서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던 순간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아예 없었던 건지 모를 정도로 청춘기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ㅠㅠ

아무튼, 청소년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사랑에 각성하는 순간을 묘사하는 문장에서는 '수만 볼트'가 아주 높은 빈도로 나타난다. 수만 볼트에 감전된 춘란은 그 뒤로 거의 노예 수준으로 변신해 신비가 자신의 몸을 촬영하도록 내버려 둔다.

신비가 자신의 몸을 적나라하게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그것을 즐기는 걸 뒤늦게 알고 난 이후에도 춘란은 자신이 사랑하는 신비를 위해 그녀가 자신의 몸을 촬영하는 것을 계속 허락한다. 

한편, 일진 서지우는 인기 드라마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일약 청춘스타가 되지만, 중학교를 자퇴하고 성공적으로 드래그 퀸으로 변신한 강태승의 학폭 고발로 하차하게 된다.

춘란의 계절 독후감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적으로 치유 불가능한 고통을 겪지만 결말에서는 놀랍도록 신비하게 그 고통을 깜쪽같이 치유해 내는 마법을 시전 하곤 한다. 그래서 결말에 마치 주인공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는 베스터셀러 <아몬드>도 그랬고, <춘란의 계절>의 여주인공 춘란도 마찬가지다.

춘란은 신비가 올린 사진들로 인하여 동급생들에게 갖은 모욕과 고통을 당했다. 그 고통은 춘란의 새엄마가 어느 날 아침, 교실에 나타나 "앞으로 춘란에게 손하나 까닥하는 놈들이 있다면, 영원히 내가 복수할 거다."라는 한 마디로 동급생들은 모두 춘란을 친구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춘란이 새엄마를 엄마로 받아들이게 되는 건 덤이다.

그리고 춘란은 신비의 집으로 찾아가 그녀의 부모에게 신비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폭파할 것을 요구했고, 신비의 부모는 순순히 그 요구를 따른다. 이 두 가지 일로써 춘란이 겪었던 치욕적인 고통은 깨끗이 치유된 듯이 소설은 끝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과연 그럴까 싶다. 사춘기에 겪은 트라우마는 평생 가도 치유가 가능할까 싶은데 소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최근 떠들썩한 정순신 아들의 학폭 사례만 봐도 그렇다. 가해자는 보란 듯이 서울대를 다니고 있지만 피해자들은 대학은커녕 극단 선택을 시도할 정도로 삶이 망가졌고, 해외로 이민을 간 피해자도 있는 것으로 들었다.

춘란이 신비에게 당한 것은 몸캠 피싱이나 다를 바 없는 중대 범죄다. 몸캠도 학폭피해 못지않게 트라우마가 깊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를 너무 가볍게 다룬게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청소년 소설이지만 좋은 게 좋다고 훈훈하게만 마무리하는 것이 청소년들에게도 좋을 리 없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해서 모두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관습도 버려야 할 때가 한참 지난 것 같지 않은가.

그래도 2/3지점까지만이라도 재미가 상당하니 청소년문학으로서 읽을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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