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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공방/외국소설

19호실로 가다 줄거리,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 단편선

by 로그라인 2022. 8. 9.

19호실로 가다, 여성의 삶과 비극의 시작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의 단편 <19호실로 가다>(김승욱 옮김, 문예출판사, 2018)를 뒤늦게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었다. 19호실로 가다에는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To Room Nineteen: Collected Stories Volume One에 수록된 20편 가운데 11편의 단편을 실었다.

19호실로 가다에 수록된 첫 작품은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이다. 이 단편을 읽고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아니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이렇게 통속적이고 웃긴 소설을 써도 뇌냐고? 했다. 줄거리를 보면, 소설가를 꿈꾸었으나 기자로 눌러앉아 살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디자이너와 어떻게든 하룻밤 자려고 작업을 하는 이야기다. 작가의 말대로 1960년대의 성적인 관습이 코미디처럼 펼쳐진다. 

그렇게 웃다, 마지막 작품 <19호실로 가다>를 읽고 그만 눈물을 쏙 뺐다. 여자 주인공에게 몰입되기는 쉽지 않은데, 완전 감정 이입해 읽었다. <82년생 김지영>이 오버랩되긴 하나, 이 작품은 김지영과는 결이 다르다. 김지영이 여성의 조건만을 주야장천 억지로라도 이야기하는 그저 그런 소설이라면, 19호실로 가다는 보다 근원적인 여성 존재의 근본적인 삶의 조건을 담은 작품이다. 

책표지

19호실로 가다 수록 작품 및 목차 

ㆍ서문

ㆍ수록 작품 :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 옥상 위의 여자,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 한 남자와 두 여자, 방, 영국 대 영국, 두 도공, 남자와 남자 사이, 목격자, 20년, 19호실로 가다

ㆍ작품 해설: 도리스 레싱의 1960년대 단편소설(민경숙)
ㆍ도리스 레싱 연보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CH, 1919 - 2013)

1919년 10월 22일 이란에서 영국인 테일러 부부의 장녀로 태어났다. 여섯 살에 가족과 함께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로디지아로 이주했다.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엄격한 규칙과 위생에 집착해 그를 수녀원 학교로 보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열세 살에 일반 학교로 진학했다가 곧 자퇴하고 열다섯 살부터 베이비시터, 타이피스트 등을 전전했다.

두 번의 이혼을 겪고 서른 살에 런던으로 이주, 다음 해 로디지아를 배경으로 인종과 성별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 《풀잎은 노래한다》(1950)를 발표했다. 그 후, 5부작 <폭력의 아이들>(1952~1969), 《황금 노트북》(1962), 《고양이에 대하여》(1967), 《생존자의 회고록》(1974), 5부작 <아르고스의 카노푸스>(1979~1983), 《다섯째 아이》(1988) 등을 발표했다. 특히, <황금 노트북>은 페미니즘 소설의 고전으로 꼽힌다. 

1999년 영국 명예훈장을 받았지만 대영제국 작위는 “대영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200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013년 11월 17일 아흔넷의 나이로 영면했다.(책날개)

19호실로 가다 줄거리

책 속 문장
지성의 실패란 무엇일까?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 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 19호실로 가다의 첫 문장이다. 도리스 레싱의 이 첫 문장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지성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뒤돌아보게 한다.

수전은 20대 후반,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결혼을 했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수전은 런던의 신문사 차장급 기자였던 매슈와 '정말로'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조언을 구하며 찾아올 만큼 신망도 있었고, 벌이도 좋았다. 

롤링스 부부는 새로 마련한 사우스 켄싱턴에 멋진 아파트에서 2년 동안 살면서 인기 좋은 젊은 부부로서 파티를 열기도 하고 남의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다 수전이 임신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고, 두 사람은 리치먼드에 정원이 딸린 저택을 구입했다.

수전은 첫째는 아들, 둘째는 딸, 그다음에 아들딸 쌍둥이를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 모든 것이 매끄럽고 흠잡을 데 없이 굴러갔다. 누구라도 선택할 수만 있다면 선택하고 싶은 삶이었다.  롤링스 부부는 일찍이 바라던 것, 계획했던 것을 모두 손에 쥐고 있었다.

소설 속 문장
"다른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서"

하지만 두 사람이 "다른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서"라고 말할만한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생활의 중심이자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헤아릴 수 없는 기쁨과 재미와 만족을 안겨줄 수는 있지만, 삶의 원천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 수전과 매슈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280쪽)

수전과 매슈의 훌륭한 인생은 분명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인생은 확실히 훌륭했다. 수전도, 매슈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혼생활, 네 아이, 커다란 집, 정원, 파출부, 친구, 자동차 등을 내심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롤링스 부부는 교육 수준이 높았고, 수많은 책을 읽었으며 안목이 깊었고 신중했다. 두 사람은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훨씬 더 예의 바르고 부드럽고 애정 어린 태로로 서로를 대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그들의 삶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수전의 가슴에서는 서서히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매슈가 집에 늦게 돌아와 파티에 갔다가 어떤 아가씨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함께 자고 왔다고 고백했을 때도 수전은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수전은 그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당연히 그를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그 일로 두 사람 모두 쉽게 짜증을 내게 되었고, 이상한 일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성격이 나빠졌다. 

수전은 가끔 자신의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중요한 것은 왜 하나도 없고, 아이들도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을 왜 느끼는지를 알 수 없는 순간에도 자기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매슈의 바람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정원이 있는 커다란 하얀 집에서 건강한 네 아이를 기르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두 사람은 이런 사정을 다 알고서, 기꺼이 그 대가를 치루려고 노력했다. 수전은 아이들을 돌봐줄 보모나 베이비시터를 고용하지 않고 그녀 혼자 힘들게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 자주 지루했고, 피곤할 때도 많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이제 10년만 더 지나면 그녀는 자기만의 삶이 있는 여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쌍둥이까지 학교에 들어가게 된 첫 날, 수전은 일곱 시간 동안 황홀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기대에 부풀었지만, 학교에 간 쌍둥이의 걱정으로 도무지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수전은 결혼을 하고나서부터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고, 자신만의 시간도 없었다. 수전은 고독에서 비롯되는 초조감으로 요리며 청소, 바느질로 할 일을 찾아 바쁘게 살았다.

한 학기가 끝날 무련, 수전은 집에 아이들이 없는 시간 동안, 아이들이 항상 옆에 있을 때보다 더욱더 바쁘게 지냈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당황한다. 그리고 수전은 방학기간인 5주 동안 집에 아이들이 가득할 테니 그녀가 혼자 있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수전은 방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감이든 공허함이든 손을 바삐 놀리고 있으면 사라질 거라고 믿으면서.

소설 속 문장
터무니 없는 장난도 때론 분노를 부른다.

그러나 막상 방학이 시작되고 사흘 만에 수전은 쌍둥이게 폭풍처럼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방학이 끝나자 초조감이 다시 수전을 사로잡았고, 분노가 그녀를 잠식했다. 수전은 자신의 이상한 감정 상태를 남편 매슈에게 결코 말할 수 없었다. 

마침내 수전은 자신이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나섰다. 수전은 디스트릭트 선 열차를 타고 사우스 켄싱턴까지 가서 서클 선으로 갈아타 패딩턴에서 내려 작고 더러운 '프레드 호텔'을 찾아냈다. 수전은 일주일에 사흘씩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방을 빌렸다. 

수전은 일주에 호텔 19호실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면 저녁 식사를 준비했고,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과 자신이 먹을 저녁 식사를 다시 요리했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수전은 집보다 19호실을 더 그녀의 것 같이 느꼈다. 수전은 고독의 시간을 점점 더 원하면서 일주일에 5일씩 집을 비우고 19호실에 머무르게 된다. 

소설 속 문장
우리는 곧잘 사라진 사람이 된다.

수전의 영혼은 19호실에 머물게 되고, 집으로는 껍데기만 가는 듯한 상황이 되면서 자신이 어머니와 아내를 사칭하는 사기꾼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매슈와 수전은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지 오래였고, 수전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사람이 되었다.

매슈는 탐정을 고용해 수전이 19호실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알아냈고, 수전은 19호실에서 느끼던 어둡고 창의적인 황홀경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19호실의 평화도 사라져 버렸다. 

소설 속 문장
인간은 모든 존재로부터 소외되는 시간이 있다.

수전은 19호실로 다시 돌아와 자아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초조감만이 남았다. 아픈 듯이 보이는 쌍둥이 몰리를 젊은 입주 가정부 소피가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을 수전은 마지막으로 창 너머에서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호실로 돌아와 즐겁게, 어둡게, 달콤하게, 그 시간을 보내며 수전은 어두운 강물로 떠갔다.

19호실로 가다 해설

<정희진처럼 읽기>의 저자 정희진은 <19호실로 가다>와 같은 불멸의 고전은 인간의 조건이 계속 그 작품을 요구한다고 평했다. 불안에 대한 도리스 레싱의 사유는 우리를 위로하고, 레싱으로부터 나혜석,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를 만난다고 했다. 레싱은 여전히 우리를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고도 했다.

씨네 21의 기자 이다혜는 19호실로 가다는 여성의 사유와 문장으로, 여성을 응시하고 재단하는 시선 너머의 남성성이 지닌 폭력성과 가부장제 안의 여성들이 어떻게 점점 무력화되는지 두려울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냈다고 섰다.

<쇼쿄의 미소>의 작가 최은영은 "내게 19호실로 가다는 낭만적 사랑이 소거된 안나 카레니나의 세계처럼 보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들은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인내하지만 그 어떤 선택도 기쁨이 되지는 않는다. 그녀들의 기쁨은 고독 속에서, 오로지 충만한 자신과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라고 썼다.

위의 서평들은 책 뒤표지에 실린 해설들이다. 작가 도리스 레싱도 여성 작가였고, 책 뒤표지에 서평을 쓴 세 사람도 모두 여성들이다. 그래서인지 가부장제 하에서의 여성의 운명에 초점을 맞춘 해설을 붙였다.

그러나 나는 19호실로 가다를 조금 다른 의미로 읽었다. 이 작품에서는 가부장제 사회가 그렇게 부각되지 않고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삶이 더 부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든 남자든, 언젠가 한 번은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각성이 일어나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작가가 말한 대로 "힘과 능력은 아직 한창이지만 아이들이 다 자라서 더 이상 온 힘을 쏟을 곳이 없어진 쉰 살의 여자들"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을 건너가는 존재가 된다. 수전의 비극적인 운명은 여자이기 때문에 비롯된 측면도 분명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종속된 객체으로 부유함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인간인 이상 그 누구도 자신의 전부는 될 수 없다. 그것이 배우자이든, 자식들이든, 부모이든, 친구이든 상관없이 그들은 단지 자아의 외부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배우자를, 자식을, 부모를, 친구를 자신을 대하듯 하는 관습이 강하게 남아있다. 이러한 관습의 질곡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사회적인 불행이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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